운용사는 청주시 상당구 미원면 운용리 삼불산 아래 위치한 작은 규모의 절이지만 약사여래불의 원력이 영험하시다하여 전국에서 많은 신도들이 찾고 있는 사찰이다. 최근에는 이곳의 ‘백의관음보살 탱화’ 가 충청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면서 더 관심을 받고 있다. 운용사의 주지 원근 스님은 직접 뵈오니 훌륭한 인품과 근면성실함으로 높은 덕망에 저절로 존경심이 드는 분이었다. 앞으로 불사를 완성되면 더 많은 중생을 구원하는 중요한 약사여래도량이 되리라 생각된다.
‘백의관음보살후불도’, 석조여래좌상 등 역사 깊은 불교계 보물 많아
2021년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97호로 지정된 ‘백의관음보살후불도’는 관음보살을 외호하는 보살들과 제자들, 사천왕을 표현한 작품이다. 19세기 말 도상과 형식을 적극적으로 계승‧발전해 후불도로서 격을 높인 의미 있는 작품이다. 1904년 금호당 약효가 청주 낙화산 (자운암모셨던 탱화)에 봉안하기 위해 제작한 불화로 알려져 있다. 금호당 약효는 19세기 말 우리나라 불교계를 대표하는 화승 중 한 명이다. 마곡사를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활동하며 많은 불화를 제작하여 우리 불교문화를 꽃피웠다.
운용사에는 이 외에도 다른 사찰에서 쉽게 보기 어려운 오래 된 보물들이 눈에 띈다. 대웅전에는 석조여래좌상이 모셔져 있다. 언제 만들어 진 것인지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으나 100여년도 더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 석조여래좌상이 발견된 이후 인연이 되어 운용사가 건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 사찰은 2003년 현 주지인 원근스님이 오신 이후 넓은 대지로 사찰을 다시 이건한 것이라고 한다. 원근스님은 선몽을 받고 이 자리에 오게 되셨다고 한다. “꿈에서 부처님을 보니 저를 보고 환하고 맑게 웃고 계셨다. 여기에 와서 보니 바로 이 부처님이셨다. 급히 모든 것을 정리하고 이곳에 자리 잡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운동인이자 정치인이었던 원근스님
운용사의 주지이신 원근스님의 인생은 참으로 파란만장했다. 태권도 4단을 취득하고 사범으로 아이들을 지도한 운동인이자 정치인이기도 했다. 청주 시의원으로 출마해 당선되었고 상임위원 5개 분과중 도시건설 분야에서 열심히 의정활동했지만, 불출마 기자회견을 하고 출가를 결심했다. 원근스님은 “15년 넘게 장학회를 하며 많은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었다. 아마 그 때 고맙게 여기신 분들이 뒤에서 당선될 수 있게 힘을 주셨던 것 같다. 시의원을 하며 지역을 위해 황소처럼 열심히 일을했다. 관내 보살사 스님과도 절에 올라가는 길을 정비 해 드리며 인연을 맺었다. 하지만 이내 정치와는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출가를 결심했다”고 회상했다.
늦은 나이에 출가한 원근스님은 5대 사찰을 모두 거치며 행자 생활을 하며 밑바닥부터 불교 공부를 하셨다고 한다. 화엄사, 송광사, 법주사, 해인사 등 전국 각지의 유명 사찰에서 행자 생활을 오래 하며 공부를 하신 것. 여러 분야에서 사회생활도 해 본 경험들을 토대로 어렵고 힘든 분들 상담도 많이 해 드리고 있다고 한다. 원근스님은 “‘인연법이란 참 중요하다’며, 부처님을 모시고 상담을 통해 보살들의 고충을 처리할 수 있어 보람되다. 화목하지 않은 가정에도 부처님의 말씀을 전해 화합해서 잘 살고 계시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약사래 부처님 원력 영험하여 힐링 ,치유 환자 사례 많아
운용사는 전국적으로 찾아주시는 분들이 많다. 약사래 부처님의 원력이 언험한 약사도량이기 때문이다. 암 환자 등 아픈 분들이 오셨다가 치유를 받고 가시는 경우가 많아 구전을 통해 많은 분들이 오신다고 한다. 절의 살림을 봐주시는 공덕장님도 기적적으로 치유된 인연으로 계속 봉사하고 계신 경우다. 공덕장님은 “죽음에 임박했을 정도로 삶의 끝에서 운용사를 찾았었다. 꿈에 선몽으로 이 절을 받았다. 다리가 아프고 불편했었는데 스님을 만나고 부처님께 기도하면서 다 나았다. 몸도 편해지고 식구들도 다 잘 되었다. 스님을 만나기 전에는 절의 법도도 모르고 사찰도 몰랐다. 무속과도 비슷하게 여겼었다. 여기 와서 스님 기도하시는 것을 보고 제대로 된 절 법도를 배우고 있다.”고 고백했다.
공덕장님이 직접 목격한 기적의 사례도 많다. “원근스님이 등을 다쳐서 허리 보호대를 하셨는데도 하루도 안 빼놓고 기도를 하셨다. 1월에 법당에서 기도하시는데 석불 부처님 가슴부분에서 물이 흘러내렸다. 와서 사진을 찍었는데 스님이 아프신 부분과 똑같은 부분이 젖어 있었다. 이후에 몸이 깨끗이 나았다고 한다.”라며 새벽 6시에 찍은 사진을 보여주기도 했다. 신도 분들도 이렇게 몸이 치유되신 경우가 상당하다. 사업하다가 너무 지쳐서 오셨던 분들도 며칠씩 머물다 가시면 몸이 치유되고 사업도 잘 되는 경우가 많다.
훌륭한 인품과 근면성실함으로 모범 되는 원근스님
원근스님은 새벽 3시면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고 한다. 주변에서는 보통 사람의 이틀처럼 하루를 산다고 평가했다. 4시부터 예불에 들어가 6시 정도에 끝나면 공양을 하고 나머지 정리를 한다. 곡물과부식도 모두 자급자족한다. 직접 농사를 짓고 예불도 하니 시간이 모자랄 정도. 고구마, 고추도 몇 백 포기씩 심어 신도들에게도 나눠준다. 밭일도 하고 일을 많이 해서 보여주시는 손에는 지문이 없을 정도였다. 신도들을 위해 전국 돌아다니며 기도도 해 드리기도 한다.
원근스님이직접 토종벌을 키우는 모습
이렇듯 원근스님은 훌륭한 인품과 근면성실함이 대단하신 분이었다. 중생을 위해 나눔과 봉사를 하겠다는 뜻은 이전부터도 쭉 이어오고 계셨다. 원근스님은 “앞으로도 계속 장학사업도 하고, 태권도를 했었던 만큼 운동하는 분들 중에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도 뒤에서 힘이 되어주고 싶다. 아프신 분들이 쉬어갈 공간도 마련해 주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다만 워낙 많은 등산객들, 관광객과 신도들이 오고 계시기 때문에 지금 당장 열악한 해우소와 가로등 부분은 지원이 이뤄졌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