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상석을 가려내 최상품의 남포벼루(藍浦硯)를 제작하는 석공예 무형문화제 김진한 명장

백운상석을 가려내 최상품의 남포벼루(藍浦硯)를 제작하는 석공예 무형문화제 김진한 명장

관리…


다섯 형제 중 유독 돌 만지는 것을 좋아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그때가 7살이었던 것 같지만 기억하지 못하는 유년시절을 고려한다면 김진한 명장은 태어나 걸어 다니는 순간부터 돌에 대해 집착했을 지도 모른다. 김진한 명장과 남포벼루(藍浦硯)의 인연은 그가 태어나기 전 조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조부는 서천사람인데 지금의 보령 청라면(당시 남포현)에 자리를 옮겨 잡고 생계를 위해 다듬이돌과 맷돌을 만들어 장에 내다 팔았다고 한다. 뒤늦게 서당과 인연을 맺으며 벼루 ‘문연’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그의 부친을 거쳐 그에게 이어온 것이다. 손재주가 좋았던 그는 일찌감치 아버지로부터 인정받았는데, 칭찬이 고래를 춤추게 한다고 이 분야에서 재능을 더 키우는 계기가 되었다. 


보령 남포현에서만 채광되는 가장 좋다는 백운상석으로 벼루를 만들다.

지금은 그리 어렵지 않은 채광도 당시에는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벼루를 만들기 위해서는 남포현의 특산품으로 전국에서 알아주는 상석으로 치는 백운상석은 단단하기가 으뜸 중 으뜸이었다. 당시에는 돌을 자르지 못해 깨트리고 떨어진 것을 주워 써야했다. 돌은 수집하기 위해 지게를 메고 아버지를 따라 나섰다가 욕심을 부려 한 가득 싣고 내려오다 너무 무거워 중간에 하나씩 하나씩 내려놔야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때는 진짜 돌 모아 오는 게 가장 힘든 일이었어. 단단하기는 제일인데 공구가 시원찮았던 시절이니께, 지금은 세상 좋아졌지. 저 앞에 저렇게 잔뜩 쌓아놓고 만들고 싶을 때 언제든지 만들 수 있으니 말이여” 그의 작업실 밖에는 기계로 잘라놓은 백운상석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남포상석은 보령시 남포현에서 생산되는 돌을 칭하는 말이다. 벼루는 이 가운데서도 상석으로 치는 백운상석으로 만들어야 했다. 김진한 명장은 백운상석을 찾아 성주산으로 들어갔는데, 성주산 정상아래 자리 잡고 있는 백운사라는 사찰 근방에서 백운상석을 발견하게 된다. 어린마음에 백운사라는 절 이름을 따 백운상석이라고 부르는구나 싶었는데, 이후 백운상석의 맥을 다라 웅천 계곡을 지나 7, 80리 떨어진 곳에서 채광하고 보니 흰 구름이 낀 듯한 석재였던 것이다. “흰 구름이 끼여 있어야 백운상석이여, 옛 현인들이 이름을 이렇게 지은 이유가 있었던 거여. 참 대단하다 혔지. 이 흰 구름처럼 보이는 이 부분을 깎아 보면 봐봐, 이렇게 구름 문양이 더 선명하게 드러나.” 김진한 명장은 백운상석의 신비함을 직접 보여주었다. 

백운상석을 두드리니 신기하게도 맑은 쇳소리가 났다. 둔탁한 소리가 나면 백운상석이 아니다. 이렇게 신비로운 백운상석은 충남 보령 남포현에서만 출토된다고 하니 보령의 특산품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한 때 다량의 벼루를 제작하기 위해 질이 떨어지는 하석으로 벼루를 만들어 남포벼루(藍浦硯)의 명예가 실추됐던 적이 있다. 서예가들 사이에서 벼루 하면 ‘남포벼루(藍浦硯)’였는데, 어느 순간 ‘남포벼루(藍浦硯)’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혹평을 듣게 된 것이다. 김진한 명인은 그들에게 벼루를 건네며 “이것도 써보고 안 좋으면 다시 돌려주시오”라고 했는데, 단 한 사람도 돌려주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모두 써보고서는 만족한다며 값을 지불했던 것이다. 


남포벼루(藍浦硯) 명예회복에 나서다. 전군 순회 전시회 개최

김진한 명장은 백운상석으로 벼루를 만들어 쓰면 먹물을 오래 참고(10일이 지나도 스며들거나 마르지 않고) 발묵이 고와(석재가 갈리지 않아 먹물이 탁해지지 않는다) 글씨를 정교하게 쓸 수 있다고 한다. 추사 김정희가 남긴 벼루 세 개중 두 개가 바로 남포벼루(藍浦硯)라고 하니 남포벼루(藍浦硯)의 으뜸은 조선시대부터 이미 문인들 사이에 크게 유명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김진한 명장은 남포벼루(藍浦硯)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지난해부터 전국 순회 전시를 열고 있다. 인사동 백운미술관을 시작으로 올해는 10월 대구 문화예술회관, 내년에는 부산 광주에서 전시를 연다. 

김진한 명장의 벼루를 살펴보면 벼루의 문양도 남다르다. 용, 봉황, 나무, 꽃, 구름 등 다양한 소재가 한 폭의 수묵화처럼 조각되어 있다. 김진한 명장은 조각을 세길 때에도 살아있는 느낌을 강조한다고 말했다. 


후계 양성 위해 정부 차원의 특단의 대책 필요

1987년 충남 무형문화재 제 6호, 1996년 석공예 대한민국 명장으로 이름을 등재한 김진한 명장은 후학양성이 어렵다고 토로했다. 현재 6명의 제자들이 매월 한번 기술 전수를 받고 있지만 앞날의 비전이 없다보니 제자들도 힘들어하는 현실이다. 최첨단 시대가 오고 있는데 전통기술만 고수하고 있는 배고픈 장인의 길을 어느 누구도 가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의 아들도 장인의 길 보다는 연구자의 길로 들어섰다. 김진한 명장은 “전통과 현대의 만남으로 새로운 작품이 출현하는 시대가 되어야 한다.”며 “무형문화재와 명장들에게 좀 더 폭넓은 지원으로 작품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새로운 대안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지원금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다 보니 명장들도 작품 개발보다 상업적 활동을 더 많이 할 수 밖에 없는 처지고 이 분야가 먹고 살기 쉬운 길이 아니다 보니 젊은이들도 좀처럼 해보겠다고 나서는 이가 없다.”고 덧붙였다. 전통 문화를 계승 할 수 있도록 국가적 차원에서 지원이 이루어져 생계 걱정 없이 작품 만드는데 열정을 쏟아 붓기를 바라는 것이다.  담당 공무원도 어느 정도 대화가 될 때면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나 행정이 이어질 수 없는 점도 안타깝다고 한다. 이렇게 어려운 길을 그는 70평생 걸어왔는데, 그 이유는 단지 좋아서 였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 힘들어도 힘든 줄을 모르는 겨.” 그는 “정부 지원금이 커져 명장들이 현대의 작가들과 콜라보 형태로 새로운 창작물을 만들어 내면 좋을 것”이라고 했다. “국내외로 전시도 하고 좋은 값에 판매하고, 그러다 보면 국보로 남길 만한 대작도 나오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나이 79세, 명장의 뒤를 이을 후계가 이어지길 간절히 바라는 김진한 명장, 큰 별이 지기 전 전통기법이 후대에 잘 전수 될 수 있도록 정부 차원의 특단의 대책이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