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정지역을 돌고 돌아 채밀한 ‘자미원 벌꿀’ 가야산양봉원 가기현 대표

청정지역을 돌고 돌아 채밀한 ‘자미원 벌꿀’ 가야산양봉원 가기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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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천초목을 벗 삼아 유랑하며 양봉으로 제 2의 인생을 설계해 성공한 이가 있다. 공직생활로 전국을 뛰어다닌 탓에 퇴직 후에도 정착생활이 쉽지 않은 그는 고향에 주거지를 마련해 겨울에만 머물 뿐, 꽃피는 봄이 오면 꽃길 따라 유랑생활을 시작한다. 깊은 산 속에서 벌을 키우며 자연의 품에서 색소폰을 부는 멋진 남자 가기현 대표를 소개한다. 

가기현 대표는 지난 2008년 양봉을 시작했다. 공직생활을 마치고 제 2의 인생을 설계하며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양봉을 택했다. 가 대표는 ‘가’씨가 중국에서 온 성씨인데 임진왜란 과 정유재란때 공을 세워 조선에서 벼슬을 하며 정착하게 되었다는 조상의 이야기부터 풀어놓았다. 조상들이 벼슬에서 내려오면 청렴하게 살아야 한다는 근본을 지키며 살았다. 그런데 양봉은 땅이 없어도 할 수 있는 일이라 조상대대로 양봉을 하며 살아왔다는 이야기다. “가까이에는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울진 군수를 하시고  큰댁 아저씨가 서산 초대 군수를 하셨다.” 집안 어르신들이 퇴직해 양봉을 하는 것을 보고 자랐기에 가 대표도 자연스럽게 양봉을 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양봉이 끝나면 단원들과 함께 색소폰 연주

가 대표는 양봉을 하며 전국을 유랑할 수 있어 더 즐겁다고 했다. 꽃이 피는 4월이 오면 벌들을 데리고 집을 나선다. 남쪽으로 내려가 꽃이 피는 일기에 따라 순차적으로 올라온다. 경상도에서 충청도 그리고 강원도 철원까지 오르며 아카시아 꿀을 따고나면 밤 꿀을 따러 공주로 향한다. 공주의 정한 밤이 유명하기 때문이다. 밤도 따고 꿀도 따고 그렇게 한 철 보내고 추석이 오면 한 해 양봉이 마무리가 된다. 고향으로 돌아와 월동을 나는데 벌들이 잠든 시기에 가 대표는 하얀 눈으로 뒤덮은 산속에서 색소폰을 연주하며 겨울을 보낸다. 색소폰도 은퇴 후에 배운 악기다. 60대 초반에 배운 것인데 70이 되고 나니 베테랑이 되었다. 여기저기서 문의가 빗발쳐 공연도 하고 재능기부도 한다. 함께 공연을 하는 단원들도 비슷한 연배에 퇴직을 한 공직자들이다. 가 대표는 서로가 마음이 통하다 보니 공연도 조화롭다고 말했다.  


‘자미원’ 브랜드로 출하

벌들이 잠든 한 겨울, 서산의 가야산에 올랐다. 200군의 벌통이 두꺼운 천막 천에 덮여 월동을 나고 있었다. 가 대표가 생산한 제품에는 가야산이 아닌 자미원이라는 이름의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가 대표는 조선시대 이성계가 도읍을 정할 때 풍수지리지에 의해 선정된 곳이 셋 있는데 첫째가 한양, 둘째가 계룡, 셋째가 자미원이라고 했다. 서울과 계룡이 발전하고 있으니 다음은 자미원인데, 아직 자미원의 정확한 위치는 모른다고 했다. 다만 인천에서 목포까지 서해안에 있다는 설이 있어 그 의미를 따 자미원이라는 브랜드를 만들었다. 자미원 아카시아꿀, 자미원 밤꿀, 자미원 로열젤리, 자미원 화분 등이다. 


풍년이면 나눠먹을 것이 많고 흉년이면 나눠먹을 것이 적다.

가 대표는 농협 하나로 마트와 지인들을 통해 꿀을 판매하고 있다. 풍년이 들면 수입이 늘어나는 것이 정상인데, 가 대표는 풍년이나 평년이나 수익은 똑 같다고 했다. 왜냐면 생산량이 늘어나 풍년이 되는 해에는 여기저기 아는 지인들에게 꿀을 선물로 나눠주기 때문이다. 가 대표는 “돈을 벌겠다는 각오로 양봉을 하는 것이 아니다”고 했다. “양봉은 투자한 만큼만 벌면 되고 나머지는 지인들과 나눠먹는 것”이라고 했다. 때문에 풍년이 되면 나눠먹을 것이 많고, 흉년이 되면 나눠먹을 것이 적다는 게 다를 뿐 수익과는 상관없다고 했다. 이렇게 나눠먹은 지인들이 다음해에는 꿀맛 좋다며 구매를 해오면 판매는 그렇게 또 이루어진다고 했다. 그는 “깊은 가야산으로 친구들이 나를 찾아오면 꿀 한 병 나눠먹을 것이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며 양봉을 하는 또 다른 이유를 설명했다. 


가 대표는 벌을 모아 꿀을 따기만 하는 양봉인을 초보, 벌통 한 군에 서 너 마리의 여왕벌을 키우면 중급, 육종 사업까지 할 수 있으면 고급자라고 정의했다. 가 대표는 얼마나 많은 군을 가지고 있느냐 보다 한 군을 하더라도 얼마나 많은 양을 채밀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고 했다. 농사도 그렇고 축산도 그렇듯이 양봉도 수확량을 늘리기 위해서는 품종개량이 필수라고 했다. 그것이 육종 사업이다. 그렇게 11년을 하다 보니, 처음 20군으로 시작한 것이 200군이 되었고 그 밑으로 제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가 대표는 해마다 단 한 명의 제자만 받고 있다.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치는데 제자의 열정을 키우기 위해 최소 10군에서 20군까지 벌통을 빌려준다. 자기 것을 키워야 중도 포기 없이 열심히 하더라는 것이다. 


퇴직 후 양봉으로 제 2의 인생을 설계하는 이들이 많다. 가 대표는 처음 양봉을 시작했던 10년 전만 해도 서산지역 양봉인들이 35개 농가였는데 지금은 190개 농가로 늘었다고 했다. 가 대표는 양봉을 시작할 때 세 가지 사항을 주의해야 한다고 했다. “첫째, 반경 4km 안에 어떤 양봉인이 있는지 확인해야 하고, 벌통 놓는 곳으로부터 반경 500m 이내에 농가가 없어야 하고, 그 500m 내에서는 농약을 통제할 수 있어야한다.”고 말했다. 농약이 없는 곳, 사람들이 사는 곳과 떨어진 청정한 곳에 자리를 잡으면 좋다는 이야기다. 때문에 가 대표는 소나무 잎을 보고 시커먼 것이 묻어나면 그 곳으로는 가지 않는다고 했다. 

가 대표는 공무원 생활 중, 그리고 교회를 다니며 알게 된 지인들이 있어 채밀에 어려움은 없다고 했다. “저 골짜기에 꽃이 많이 폈다. 저 산 너머에 꽃이 많다”는 알짜 정보가 그들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막걸리를 식초로 만들어 장수말벌을 잡는 방법

벌을 보호해야 한다. 가 대표는 “최근 소나무재선충으로 농약을 살포하는데 이는 벌과 나비까지 죽이는 악순환을 만든다”고 했다. “벌과 나비를 죽이지 않으면서 소나무도 살리고, 벌과 나비를 죽이지 않으면서 유해충을 잡는, 비록 원시적인 방법이고 먼 길을 돌아가더라도 그리해야 한다”고 밝혔다. 가 대표는 “이런 일은 머리 좋은 박사들이 해야 할 일”이라며 “막걸리에 솔잎으로 병입구를 막아 식초를 만들어 장수말벌을 잡는 것과 같은 그런 방법을 고안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농사는 하늘이 내려주는 것이라고 했다. 양봉도 마찬가지다. 자연의 섭리를 벗어나 인간의 의지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가 대표는 해와 달, 별의 움직임으로 한해의 농사를 점치는 만세력을 공부하고 있다. 지난 11년을 돌아보면 딱 맞아 떨어지더라는 것이다. 그 저서에 의하면 올해 2019년은 대풍을 맞는 해가 될 것이라고 한다. 한해가 벌써부터 기대된다. 양봉과 색소폰으로 삶의 후반부를 멋지게 연주하고 있는 가기현 대표의 말처럼 전국이 풍년이 되는 한해가 되면 좋겠다. 가 대표의 잠든 벌꿀들도 건강하게 일어나 건강한 ‘자미원 벌꿀’이 채밀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