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이하이(위해, 중국어: 威海, 병음: Wēihǎi), 웨이하이 요새(중국어: 威海卫, 병음: Wēihǎi Wèi로도 알려짐)는 산둥성의 가장 동쪽 지역으로, 해안선의 길이가 약 1000여km로 산둥성 전체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항구 도시이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서 북동남은 황해에 면해 있고, 북쪽 방향은 랴오둥 반도와 가까우며, 동쪽은 한반도와 93해리 떨어져 있어 한국과 지리적으로 매우 가깝다. 인구는 280만 명, 면적은 5797km2이다.
웨이하이시는 해도(海岛)의 경치, 해안의 백사장, 온천, 기이한 산과 바위, 저수지, 호수 등의 뛰어난 자연경관을 자랑하며 독자적인 양식을 갖춘 도시건축, 공원, 사적(史迹), 도교사원 등의 인문경관으로도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다. 또한 웨이하이시는 중국 최초의 위생도시이기도 하다.
웨이하이시는 지리적 여건이 좋고 해양 자원이 풍부한 도시로서 한국과 경제교류 비중이 높으며, 해양 생산물 생산가공기지, 타이어 생산 기지, 어구 생산 기지, 선박제조와 항구 물류기지 건설 등을 통하여 중국 내 ‘종합경제역량 50대 도시’, ‘중국투자환경우수 40대 도시’, ‘중국경쟁력 도시 상위순위도시’로 뽑히는 등 중국에서도 가장 빠른 경제발전이 이루어지는 도시 가운데 하나이다.
한편 중국 근대 제1 해군부대 북양 수군(第一支海军北洋水师)의 창시지(创始地)로서 청일전쟁 때는 영국 해군의 주요 해군 기지로도 쓰였다. 1988년 국무원은 웨이하이 류공다오(刘公岛), 청산터우(成山头)를 국가급 풍경 명승지로 지정했다.
웨이하이는 한중 수교 전부터 페리가 운항된 곳으로 일찍부터 한국과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진 도시이다. 한때는 1800여 개의 한국투자기업이 활동하였고 5만여 명이 넘는 교민이 거주하였으나, 2008년 신노동법 발효를 계기로 인건비의 급상승과 근로자에게 유리한 노동법의 개정으로 경쟁력을 상실한 대다수의 투자기업들이 동남아 등지로 많이 이전하면서 위해 거주 한국교민의 수도 자연히 줄어들었다.
현재는 칠백여 개의 기업이 활동하고 있으며 만 팔천여 명의 교민이 거주하며 타국에서의 삶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고 있다. 한인들의 국제무대에서의 경쟁을 두고 양이 아닌 질적 수준에 귀추가 주목되면서 한인회의 자질과 역할 및 한인회장의 마인드에 대한 중요성도 커지고 있다. 2014년 웨이하이 한인회장으로 취임한 김종유 회장을 만나 연임 4년 동안의 활약상과 앞으로의 마지막 한 해를 남겨 둔 소회를 들어 보았다.
민간대사 버금가는 한인회에 정부의 관심과 지원 확대 부탁
2014년 한인회장으로 취임한 김종유 회장은 첫해는 ‘세월호 사건’으로, 2015년은 중동호흡기증후군 ‘메르스(MERS) 사태’ 때문에 단체행사를 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고, 지난해에는 위해시 정부의 지원과 협조를 약속받고 승인받아 5월부터 야심차게 준비하던 ‘한국의 주’ 행사가 ‘사드 사태’의 영향으로 위해시 정부 승인이 번복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대내외적으로 여러 어려운 환경에서도 그는 연임 회장으로서 4년 동안 활약하였으며, 새로운 희망의 등불을 밝혀 재도약의 기틀을 마련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이며 한해를 보냈다.
하지만 올해 5월 9일 발생한 ‘위해중세한국국제학교’ 부설 ‘중세유치원’ 통원버스 방화 사건으로 11명의 어린 천사들이 사망한 참사가 발생하여 큰 어려움을 겪었고, 가슴 아픈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이 사건 이후, 김 회장은 한국학교설립을 위하여 설립위원회를 구성하고 기부금 모금을 하면서 적극적 열과 성의를 쏟으며 추진하였지만, 한·중 간의 사드 영향으로 상당한 어려움을 겪으며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주위의 대다수 임원진을 포함한 지인들과 중국 정부의 친하게 지내던 지인까지도 현 정국에서 한국학교설립은 불가능하니까 되도록 빨리 포기하여 교민사회의 혼란을 최소화하도록 요청할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설립위원회의 적극적인 노력과 열정으로 마침내 지난 10월 18일 중국 교육국의 예비비준과 10월 24일 한국 교육부의 설립승인을 받아내었으며, 개교 6개월 전에 운영승인은 받아야 하는 규정과 관련해서도 교육부와 법제처가 법령개정을 통하여 지원을 해 주었고, 국회 예산결산위원회가 11월 정부예산안 심의에서 웨이하이한국학교 설립에 예산이 반영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이러한 노력 끝에 내년 3월, 중국정부에서 정식 승인을 받은 한국학교가 개교된다. 한국학교 설립을 위해 동분서주한 김종유 회장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금까지 힘들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한국학교설립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지원과 협조를 해주신 설립위원회 여러분과 칭다오총영사관 이수존 총영사님, 정윤식 영사님과 교육부 박지애, 김수현 사무관님과 관계자님 및 법제처의 관계자분들, 국회의 여러 의원님들께 위해지역 교민을 대표하여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저는 15~16년째 한인회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한인회는 민간대사 역할을 하고 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공관과 거리가 먼 이 외국의 도시에서 교민사회를 위해 봉사하고 한국상회와 한국인회의 업무를 겸업하고 있는 한국대표단체인 한인회의 역할은 절대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한인회의 지속적인 유지를 위하여 지원과 성원을 아끼지 않으시는 각 임원진과 전임 회장님을 포함한 고문님들, 그리고 60~70%의 후원금을 지원해 주시는 우리투자기업 회원사에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회장 임기 내 한국학생 중국어 말하기 대회, 현지 고아원과 양로원 봉사활동, 주변 해변 쓰레기 수거 정화운동, 한국 주 행사 등을 통하며 한국인의 긍정적 이미지를 높이고자 한국정부의 지원을 요청했으나 많이 부족했고 상황이 열악했습니다. 앞으로 한인회사무국 운영비를 포함한 재정지원과 교류활동 등 한국 정부의 많은 관심과 지원이 확대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1997년에 동경복장으로 중국 진출 2000년 본격적 사업 시작
김종유 위해 한인회 회장은 에이전트로 수교 전부터 중국을 오갔다. 그가 위해에 투자를 한 것은 1996년 말이다. 천진과 위해를 오가며 그는 중국의 틈새와 가능성을 유심히 살핀 후, 의류 공장을 설립했다. 처음에는 관리자만 주둔시키고 운영을 했으나 3년 동안 적자만 “처음에는 실무관리자만 주둔을 시켰어요. 3년 반 동안 손실만 나서 부채를 정리하고, 회사 문을 닫고 정리하러 들어왔다가 눌러 앉게 되었습니다. 당시 직원들이 200명 정도 됐었는데, 회사를 접어야 할 이유를 설명했더니 그들은 계속 일을 하고 싶다고 하더라. 직원들의 만류에 한국에 들어갔다가 일주일 후에 다시 나와서 6개월 동안을 회사에서 먹고 자며 일을 했습니다. 막상 해 보니까 직원들이 성실하고 잘 따라 오더라고요. 그리고 손실도 발생하지 않았어요. 6개월 동안 현지 근로자들이 먹는 빵을 같이 먹으면서 공장에서 생활하며 회사를 일으켰습니다. 그러고는 피골이 상접해 한국 대학병원에 한 달 동안 입원을 한 적도 있었죠.”
주로 일본에 수출을 하면서 2011년까지 흑자 생산을 했던 동경복장은 아베 정부 출범 이후 환율문제로 많은 손실을 보았으며, 인건비 상승, 노동법 강화 등의 문제로 전환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 김 회장은 타국에서의 사업은 국내에서와는 달리 단순히 이윤을 남기는 데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금전과 물류가 조화를 이루고, 타민족과의 융합이 빚어낸 산물이 되어야 한다고 전했다. 중국에서 한국기업이 부딪히고 있는 경제성장의 장애에 대해 김 회장은 단연 임금 인상을 꼽았다. 그렇기에 노동집약적 산업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실정이라고. 이제 중국에서는 저렴한 인건비를 겨냥한 노동집약적 사업은 자동화 시설을 갖추지 않는다면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또한 예전처럼 모든 일을 ‘꽌시’로만 통하지 않고 이제는 원칙과 합법적인 기업경영을 요구하고 있는데, 외국인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법령은 없으며 예전처럼 일반 상식에서 벗어난 일들도 많이 줄어 든 편이라고 했다. 아울러 IT산업, 의료·미용사업, 프랜차이즈, 교육사업, 물류·유통 쪽의 사업이 각광받는 업종이 될 것이라고 한다.
교민들의 안전한 삶과 사업컨설팅에 한인회 적극 협조
과거 위해에는 이천여 개의 기업과 오만여 명의 한인이 거주했었다. 그러나 노동보험문제 등 간접비용 감당을 못 이기고 중소기업들이 대거 퇴출하면서 현재는 칠백여 개의 기업과 만 팔천여 명의 교민이 남아 있다. 한국에서 비행시간으로 약 1시간 정도면 갈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여행과 시장조사를 하러 왔다가 자리를 잡는 경우가 많다. 과거에는 노동집약적 산업이 많았으나 지금은 서비스업과 물류·유통업이 많다. 김 회장은 위해 진출을 희망하거나, 이미 주둔한 기업들에게 다음과 같은 노하우를 전한다.
“어느 나라나 다 같겠지만, 현지파트너를 잘 만나야 합니다. 사업의 특성상 남의 나라에 가서 자기 혼자 일을 해나간다는 것은 무리이며 앓느니 죽는다고, 독불장군의 길을 선택하는 것은 괜한 시간과 금전, 에너지 낭비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꼭 알아 두어야 할 점은 모든 일을 처리하는 데는 철저한 자료 수집과 계약에 의해 진행을 해야 합니다. 사업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을 하다보면 어쩔 수 없이 법률적 문제를 통과해야 하는 일들이 많이 발생하는데, 중국의 법은 외국인에게도 합리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서류와 증거를 확실히 남겨야 합니다. 일반 소액 투자자들은 지인들의 말만 듣고 일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인회에 문의를 하면 얼마든지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섣불리 말하는 사람들만 믿고, 불법적인 일을 하는 행위는 절대 피해야 한다는 점을 꼭 명심하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가족들 있기에 고생의 보람 느껴
그는 한인회 회장을 맡기 전에는 웬만하면 주말마다 한국에 나가 가족들을 만났다. 그러나 한인회 회장으로 활동하는 동안은 가족들과 만나는 시간이 많이 줄었다. 17대 종손인 자신을 대신해 집안의 큰살림을 도맡고 있는 아내에게 감사를 전하며 아빠가 곁에 없는 가운데에서도 건강하고 바르게 잘 커주는 두 자녀에게도 사랑과 고마움을 전했다. 아내와 두 자녀가 있기에 행복과 고생의 보람을 느낀다는 김 회장은 올해 임기가 끝나는 대로 다시 주말가족 상봉을 하며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있는 행복한 인생을 만끽할 계획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