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상동농협의 창립멤버이자 4선 조합장인 도태만 조합장은 상동농협의 산증인이자 역사다. 농민 조합원의 고충을 덜어주기 위해 일찍이 비료와 농약 무상지원 사업을 펼치기도 했다. 그는 농민의 권익신장과 복리증진, 사회에 나눔과 베품을 실천한 공로로 농협중앙회로부터 ‘사회공헌사업 부문 우수상’을 받았다. 부상으로 받은 100만 원 조차 10㎏들이 쌀 10포대를 구입해 지역 내 어려운 독거노인 10명에게 1포대씩을 전달하고, 식사를 대접하는 데 사용했다. 오로지 농민을 위해 무슨 일을 하면 좋을지 그 생각만으로 가득한 그를 만나봤다.
1972년 말단 직원에서 4선 조합장에 이르기까지
도태만 조합장은 1972년 상동농협을 창립할 때 직원으로 처음 입사했다. “말단 직원으로 갖은 일을 도맡아했다. 가방에 공책 하나 넣어 다니면서 지게 지고 근무했다. 위험한 농약 장사, 기름 장사부터 손을 거치지 않은 일이 없다. 초창기 3년 동안은 월급도 없었다. 출근 시간이나 퇴근 시간도 정해진 것이 없었다. 해가 뜨면 출근이고, 캄캄해지면 퇴근했다. 자본금을 한 푼이라도 더 모으기 위해 헌신해 온 시절이었다. 온 열성을 바쳐 농협 재산을 하나하나 일궜다는 자부심이 있다.” 그는 그렇게 힘든 세월을 거쳐 오늘의 농협 살림을 일궜다.
그는 신용, 지도, 경제, 총무, 대부 등 모든 업무를 거치면서 농촌의 실정과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게 되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농민 한 명 한 명을 알뜰히 챙겼다. “농협은 계속 성장해 나갔지만 농민의 어려움은 나아지지 않았다. 당시에는 금리도 너무 높았다. 기본 이자도 15%로 높았지만 연체이자는 18~ 22%까지 육박하였다. 영농자금도 쓰고 일반 대출도 쓰면서 1년 내내 농사를 지어봤자 이자도 갚지 못하는 농민이 많았다. 어떻게 하면 농민들을 도와줄 수 있을까 늘 고민 이였다.”던 그는 연체를 막는 데 집중했다. 이자율이 높은 연체를 막아주는 것만 해도 큰 혜택이었다. 당시로는 전체 연체된 대출금 해당자에 수천억 원의 도움을 준 셈이었다.
항상 농민의 입장에서 갖은 노력을 하는 그였기에 조합장으로 추천을 받은 것은 당연지사였다. 1998년, 조합장으로 추대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겨우 48세였다. “상동면 지역의 유지들로 구성된 ‘바르게살기’ 총회의 약 60명에 달하는 회원들이 저를 조합장으로 추천했습니다. 우리 지역 농촌을 이끌어 가고 조합원을 이끌어갈 적임자를 찾자는 자리에서 나온 이야기였지요. 집에서는 한사코 반대를 했지만 저를 믿고 추천해 주는 분들과 당연히 뜻을 함께 해야 한다는 권유 때문에 조합장에 출마하게 되었습니다. 사표를 내고 해야 하는 도전이었기에 걱정도 컸습니다. 한창 일을 해야 할 나이였는데 낙선이라도 하면 큰 일이 날 상황이었죠. 선거 비용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주위에서는 도 부장(당시 지도부장으로 근무 중)이 농민을 위해 얼마나 도와줬느냐, 형제간이 나와도 도 부장을 찍어 주겠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나오던 때였죠.”
큰 결심으로 조합장 선거에 나온 그를 조합원들은 역시 믿고 지지해 주었다. 약 67% 지지로 엄청나게 높은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이후 재선에도 성공하며 농민을 위한 정책을 활발히 펼쳐갔다.
상동농협의 성장 이끌고 농민을 위한 무상 농약, 비료 공급도
그가 조합장이 되면서 상동농협은 급속도로 성장해 나갔다. 농협의 실무자로서 농협의 구석구석을 챙겼던 그의 손길이 닿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어떤 식으로 사업을 추진해 나갈지, 어떻게 성장시킬지 모두 알고 있었다. 그렇게 추진하다 보니 농협이 급속도로 성장했다. 1년 후에는 조합원들에게 3년간 약 2만여 포 비료를 무상으로 공급했다. 소금도 약 3천여 포 정도 무상으로 주었다. 이런 혜택이 있다 해서 관내 시민신문, 경남일부, 경남신문, 부산일보, 밀양신문 등 신문에도 엄청나게 게재되었다.
그 후 2015년, 조합장 동시선거에 조합원들은 다시 그를 필요로 했다. 다시 도전한 그는 약 60%의 지지를 받아 다시 조합장에 당선됐다. 지역에서도 가장 높은 지지도였다. 또 재임에 성공하며 밀양에서 최초 4선에 성공한 조합장이 탄생하였다.
항상 농민의 입장에서 실익 증대 위한 노력 다해
도태만 조합장에게 그토록 높은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를 물었다. 그는 “모든 일을 하면 책임감을 가지고 한다. 말만 가지고는 일을 안 한다. 내가 한 말은 100% 책임을 진다는 자세로 한다. 조합장이라도 항상 작업복을 걸어놓고 일했다. 농약, 사료나 생활물품 이 들어온다 하면 항상 먼저 나가 창고 앞에서 대기했다. 또한 아픈 부위를 만져주기 때문이고. 항상 어려운 농민을 위해서 일을 해 왔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있는 사람 도와주는 것보다 없는 사람을 도와주기 위해 노력한다. 농민을 보살피고 농민의 입장에서 생각하고자 노력한다.”고 전했다.
그는 지금도 조합원의 실익 증대와 농업 경쟁력 강화에 역점을 둔 다양한 정책 개발에 나서는 한편, 맞춤식 영농교육을 통한 우수 농산물 생산 및 판매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총자산도 그가 조합장을 맡으면서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2018년 말 기준으로 자산 826억에 달한다. 2014년 말 대비 103억원 증가했다. 신용사업 실적 또한 대출금, 예수금 모두 100억 이상 증가했다. 올해는 출자금 외에도 10만원씩 물품권으로 회원에게 돌려주었다.
“조합장으로서 농업인 조합원의 소득증대를 위하여 많은 지도를 하고 있으며, 유통판매 분야에서도 전국 공판장을 비롯한 대형마트 등 판로의 길을 넓히기 위해 발로 뛰고 있습니다. 금년에도 어떻게 하든 경영을 잘 해서 농가 소득 올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해주십시오. 농협 사업도 이탈하지 말고 이용해 주시면 거기에서 오는 소득은 모두 조합원들에게 돌려드리겠습니다. 제가 조합장 하는 동안은 어떻게든 조합원들에게 모든 이익을 환원할 수 있도록 약속합니다.”
한 평생을 상동농협에서, 농민만을 위해 살아온 도태만 조합장의 마지막 인사가 가슴 깊이 박혔다. 나지막한 목소리에 꾹꾹 담아 말하는 진심을 모두가 알고 있기에 4선 조합장이 가능하지 않았을까?